메타우루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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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타우루스 전투는 기원전 207년에 벌어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의 중요한 전투이다.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와 로마 공화국 군대 사이에 벌어졌으며, 로마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은 전사하고 카르타고 군대는 패배하여, 한니발의 이탈리아 고립과 로마의 지중해 패권 장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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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우루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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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메타우루스 전투 |
분쟁 | 제2차 포에니 전쟁 |
시기 | 기원전 207년 6월 23일 |
장소 | 메타우로 강, 마르케 주, 이탈리아 |
결과 | 로마의 승리 |
관련 전투 | 제2차 포에니 전쟁 |
구글 지도 검색어 | 메타우루스 강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로마 공화정 |
교전국 2 | 카르타고 |
지휘관 및 지도자 | |
로마 공화정 지휘관 | 마르쿠스 리비우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 |
카르타고 지휘관 | 하스드루발 바르카 |
병력 규모 | |
로마 공화정 병력 | 37,000명 |
카르타고 병력 | 30,000명, 코끼리 10마리 |
피해 규모 | |
로마 공화정 피해 | 2,000~8,000명 사망 |
카르타고 피해 | 10,000명 사망 5,400명 포로 코끼리 6마리 사살 코끼리 4마리 포획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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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투 전 상황
기원전 207년, 하스드루발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무찌른 뒤 그의 형 한니발이 진격한 길을 따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한니발이 이미 갈리아인들에게 잘 알려졌고, 로마의 압제에 반감을 심어주었기에 이탈리아 침공은 한니발이 걸린 시간보다 훨씬 단축되었다. 하밀카르 바르카의 또 다른 아들이 이탈리아를 침공한다는 소식에 로마는 공포에 휩싸였다.[1]
로마 원로원은 마르쿠스 리비우스와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기원전 207년의 집정관으로 선출하고 각각 하스드루발과 한니발을 막도록 했다. 로마군은 하스드루발이 어느 길로 남하할지 몰라 리비우스는 2개 군단을 이끌고 떠났고,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더 많은 병력으로 한니발과 대치하고 있었다.[1]
하스드루발은 형 한니발에게 전문을 보냈으나, 이 전문은 한니발에게 도착하기 전 집정관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병사들에게 발각되었다. 전문을 해독한 네로는 보병 6,000명과 기병 1,000명을 편성하여 한니발이 눈치채지 못하게 진영을 빠져나가 리비우스를 도우러 북상했다. 네로는 거의 하루에 100km에 이르는 강행군으로 리비우스의 진영에 도착하였다. 당시 로마 공화정 법으로는 집정관이 맡은 구역을 이탈할 때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 했기에 네로의 행동은 일종의 군무이탈이었다.[1]
예상보다 빨리 이탈리아로 진입한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군도 메타우로 강 북쪽 연안에 숙영지를 짓고 있었다.[1]
2. 1. 카르타고의 전략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무찌른 하스드루발은 기원전 207년 그의 형 한니발이 진격한 길을 따라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때의 이탈리아 침공은 한니발이 걸린 시간보다 훨씬 단축되었는데, 이는 한니발이 이미 갈리아인들에게 잘 알려졌고 오히려 로마의 압제에 반감을 심어주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 다른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이 이탈리아를 침공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로마는 공포에 휩싸였다.[1]하스드루발의 이탈리아 원정은 그 시점까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는 바에쿨라 전투에서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를 따돌리고, 켈트이베리아에서 용병 부대를 모집했으며, 기원전 208년 겨울에 골로 진입한 후, 기원전 207년 봄까지 기다려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로 향했다. 하스드루발은 형이 10년 전에 건널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군했는데, 이는 한니발 군대가 남긴 건설물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원정 중에 한니발을 괴롭혔던 갈리아의 위협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갈리아인들은 이제 카르타고인들을 두려워하고 존경했으며, 하스드루발은 알프스를 무사히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열성적인 갈리아인들이 그의 대열에 합류했다. 하스드루발은 형과 마찬가지로 히스파니아에서 길러지고 훈련된 전투 코끼리를 알프스 너머로 성공적으로 데려왔다.[1]
대 스키피오에 의해 카르타고 노바를 상실하고 바에쿨라 전투에서도 패배한 카르타고군은 남부 이탈리아(마그나 그라에키아)에 있는 한니발과 합류하여 전황을 역전시키려 했다.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침입했다.[1]
2. 2. 로마의 대응
기원전 207년, 하스드루발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무찌른 뒤 그의 형 한니발이 진격한 길을 따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한니발이 이미 갈리아인들에게 잘 알려졌고, 로마의 압제에 반감을 심어주었기에 이탈리아 침공은 한니발이 걸린 시간보다 훨씬 단축되었다. 하밀카르 바르카의 또 다른 아들이 이탈리아를 침공한다는 소식에 로마는 공포에 휩싸였고, 원로원은 마르쿠스 리비우스와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기원전 207년의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각각 하스드루발과 한니발을 막도록 했다.하스드루발은 형 한니발에게 전문을 보냈으나, 이 전문은 한니발에게 도착하기 전 집정관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병사들에게 발각되었다. 전문을 해독한 네로는 보병 6,000명과 기병 1,000명을 편성하여 한니발이 눈치채지 못하게 진영을 빠져나가 리비우스를 도우러 북상했다. 네로는 거의 하루에 100km에 이르는 강행군으로 리비우스의 진영에 도착하였다. 당시 로마 공화정 법으로는 집정관이 맡은 구역을 이탈할 때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 했기에 네로의 행동은 일종의 군무이탈이었다.
예상보다 빨리 이탈리아로 진입한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군도 메타우로 강 북쪽 연안에 숙영지를 짓고 있었다.
3. 전투의 전개
로마군은 우익에 네로, 중앙에 포르키우스, 좌익에 리비우스가 지휘를 맡았고, 카르타고군은 전투 코끼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전투 초기에는 양측이 백중세였으나, 네로가 이끄는 로마군 우익이 카르타고군의 배후를 돌아 좌익을 측면 공격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이 공격으로 카르타고군의 갈리아 병사들이 무너졌고, 이는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하스드루발은 코끼리를 투입했지만, 코끼리들이 날뛰면서 오히려 아군에게 피해를 주자 코끼리를 죽이고 전투에 돌입했다.[5] 하스드루발이 직접 이끌던 히스파니아 병사들은 로마군에 포위되어 무참히 쓰러졌다. 하스드루발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적진 한가운데로 말을 몰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3. 1. 메타우루스 강에서의 대치
네로가 밤중에 도착했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까지 카르타고군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하룻밤 사이에 로마군의 병력, 특히 기병이 대폭 증강된 것을 보고 전투를 꺼리고 군사를 물렸다. 두 명의 집정관의 가세로 사기가 오른 로마군은 뒤를 쫓았고, 결국 다음 날 메타우루스 강을 끼고 양군은 전투 진영을 갖추었다.[1]양측의 정확한 병력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로마군은 하스드루발 군대에 8,000명의 리구레스인이 있었으며, 이는 보병의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추정했다. 고대 자료에서 제공되는 데이터는 종종 불충분하거나 매우 모순된다. 예를 들어 아피아노스는 카르타고 군대의 병력이 보병 48,000명, 기병 8,000명, 코끼리 15마리였다고 말한다.[2] 리비우스는 전투가 끝났을 때 카르타고 병사 61,400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주장한다.[3]
이 수치는 특히 폴리비오스가 카르타고와 갈리아인 사망자를 10,000명으로 추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현대 추정치는 하스드루발 군대가 약 30,000명 규모였고,[4]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군대도 거의 같은 수치였다고 제시한다. 프로프라에토르 L. 포르키우스 리키니우스는 두 개의 군단을 지휘했는데, 이는 집정관과 같은 수의 병력이었다. 이는 마르쿠스 리비우스와 포르키우스 리키니우스가 동맹군을 포함하여 32,000~40,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 클라이언트 중 일부가 보조 병력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동맹군 병력의 수는 평소보다 적었을 수 있다. 포르키우스의 군단은 병력이 부족했다. 로마군은 하스드루발과의 이전 전투로 인해 병력이 더욱 감소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하스드루발의 야영지에 3,000명의 포로가 있다는 증거로 뒷받침된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7,000명의 병력에는 가는 길에 2,000명의 자원병이 합류했으며, 그가 도착했을 때 로마군은 하스드루발에 맞서 37,000명의 병력을 집중시켰다.
대부분의 카르타고 군대와 마찬가지로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히스파니아인, 리구레스, 갈리아인 등 다양한 문화와 민족의 혼합으로 구성되었으며, 소수의 아프리카 출신도 있었다. 하스드루발의 우익은 메타우로 강에 위치했고, 그의 좌익은 접근할 수 없는 언덕 지형이었다. 그는 자신의 우익에 기병을 배치하여 그를 측면 공격할 수 있는 우세한 로마 기병으로부터 방어했다. 이와는 반대로 하스드루발의 좌익은 왼쪽에 언덕, 앞쪽에 협곡으로 잘 보호되었다. 하스드루발의 정예 부대는 그의 히스파니아 베테랑으로, 그는 그들을 깊은 대열으로 그의 우익에 배치했다. 중앙은 리구레스로 구성되었으며, 역시 깊은 대열로 배치되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좌익에는 피로한 갈리아인들을 언덕 꼭대기에 배치하고, 그들 앞에 깊은 협곡으로 방어했다. 하스드루발은 또한 10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을 전면에 배치했다.[5] 그는 코끼리 전쟁에 혁신을 도입하여, 코끼리가 자기 부대를 향해 돌아서는 일이 자주 발생했기에, 그들의 마부들에게 망치와 끌을 지급하여 그런 경우 그들을 죽이도록 했다.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는 카르타고 군대 앞에 로마 군대를 배치했다. 로마 좌익은 마르쿠스 리비우스가 지휘했고, 우익은 접근할 수 없는 갈리아인을 마주하며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지휘했으며, 중앙은 포르키우스 리키니우스가 지휘했다. 로마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을 마주보며 좌익에 배치되었다.
3. 2. 전투의 양상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 이끄는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에 맞서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로마군 좌익은 마르쿠스 리비우스, 우익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중앙은 프로프라에토르 포르키우스 리키니우스가 지휘했다. 로마 기병대는 카르타고 기병과 대치하며 좌익에 배치되었다.전투는 로마군 좌익이 카르타고군 우익을 공격하며 시작되었고, 곧이어 로마군 중앙도 진격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카르타고 기병은 로마 기병에 밀려났다. 카르타고군 우익과 중앙은 잘 버텼고, 전쟁 코끼리는 로마군 전열을 무너뜨리고 혼란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5]

로마군 우익의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하스드루발의 좌익에 있는 갈리아인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는 갈리아인들에게 도달하려는 시도가 헛됨을 깨닫고, 병력의 절반을 이끌고 전투 중인 로마군 전열 뒤를 돌아 카르타고군 우익을 갑작스럽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히스파니아인으로 구성된 카르타고군 우익은 마르쿠스 리비우스의 정면 공격과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측면 공격을 동시에 견디지 못하고 후퇴했고, 카르타고군 중앙의 리구레스도 함께 후퇴했다. 코끼리들은 날뛰며 양측 병사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하스드루발은 병사들과 함께 싸우며 도망치는 병사들을 독려하여 전투를 재개하려 했다.
카르타고군 좌익의 갈리아인들은 이제 삼면에서 공격받는 상황에 놓였다. 앞에서는 포르키우스 리키니우스, 오른쪽 측면에서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후방에서는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공격했다. 이때쯤 로마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을 완전히 격파했고, 카르타고군 좌익의 후퇴로 하스드루발 군대는 전반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코끼리 6마리는 조련사들이 폭주를 막기 위해 죽였고, 나머지 4마리는 로마군에게 포획되었다.
하스드루발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고, 남은 히스파니아 경호병들과 함께 로마군 대열로 돌격하여 전사했다. 그는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로부터 장군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네로는 하스드루발의 시신을 찾아 그의 목을 자른 뒤, 부하들을 이끌고 한니발과 대치하고 있는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네로가 한니발 몰래 빠져나가 메타우루스 전투를 벌이고 다시 한니발에게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4일이었다. 한니발은 그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7]
네로는 하스드루발의 목을 담은 상자를 한니발의 진영으로 던지게 했다. 상자를 열어본 한니발은 경악했다. 이로써 로마 원정에 대한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7]
메타우루스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카르타고의 패배는 기정사실이 되었고, 한니발의 이탈리아 원정은 좌절되었으며, 로마는 스페인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6] 이 전투는 칸나에 전투에서의 한니발의 대승이나 자마 전투에서의 최종 패배와 같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다른 전투에 가려져 있지만, 네로와 마르쿠스 리비우스의 승리는 로마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집정관 리비우스가 담당하던 전선에서 일어난 전투였기 때문에, 집정관 네로에게 개선식 거행은 허락되지 않았다.[6]
4. 1. 카르타고의 패배와 전략적 차질
네로는 하스드루발의 시체를 찾아 그의 목을 잘랐다. 그러고는 부하들을 이끌고 다시 한니발과 대치하고 있는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네로가 한니발 몰래 빠져나가서 메타우루스 전투를 벌이고 다시 한니발에게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4일이었다. 한니발은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동생 하스드루발이 그렇게 빨리 알프스를 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7]네로는 하스드루발의 목을 담은 상자를 한니발의 진영으로 던지게 했다. 상자를 열어본 한니발은 경악했다. 이로써 로마 원정에 대한 그의 꿈은 산산히 부서졌다.[7] 네로는 쓰러진 적에 대한 존경심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스드루발의 머리를 몸에서 잘라 남쪽으로 가져가 형의 패배를 알리는 징표로 한니발의 진영에 던졌다.[6] 이때까지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이탈리아 도착과 죽음을 몰랐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카르타고 승리의 가능성은 사라졌고, 한니발은 이탈리아반도의 끝자락에 갇히게 되었다.
바이런은 이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집필: 한니발을 속이고 하스드루발을 속인 필적할 데 없는 행군을 하여 군사 역사상 거의 견줄 데 없는 업적을 달성한 집정관 클라우디우스 네로. 한니발이 그의 귀환에 대한 첫 소식은 하스드루발의 머리가 그의 진영에 던져진 것을 보는 것이었다. 한니발은 이것을 보고 "로마가 이제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라고 한숨을 쉬며 외쳤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이 승리에 힘입어 그의 제국 동명이인이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오명이 다른 사람의 영광을 가렸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이름이 들리면 누가 집정관을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인간사는 그런 것이다.
메타우루스 전투의 중요성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 전투는 에드워드 셰퍼드 크리시의 ''세계를 바꾼 15번의 결정적 전투''(1851)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한니발을 이탈리아에 고립시킴으로써 로마의 대륙 지배를 향한 진출에서 카르타고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제거했기 때문이다. 폴 K. 데이비스는 이 전투의 중요성을 "카르타고의 패배로 한니발을 지원하려는 시도가 끝났고, 그의 이탈리아에서의 노력이 좌절되었으며, 로마는 스페인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6]
하스드루발의 장교 중 한 명인 하밀카르는 패배 후 치살피나 갈리아에 남아 4만 명의 연합 갈리아 군대를 조직하여 기원전 200년에 로마에 대항하여 플라켄티아를 약탈했으나, 크레모나 전투에서 로마에 의해 패배하고 죽임을 당했다. 한편, 살아남은 히스파니아 용병의 일부는 여정을 계속하여 결국 한니발에게 도달했다.[7]
4. 2. 로마의 승리와 전쟁 주도권 확보
네로는 하스드루발의 시체를 찾아 그의 목을 잘랐다. 그러고는 부하들을 시켜 하스드루발의 목을 한니발의 진영으로 던지게 했다. 네로가 한니발 몰래 빠져나가 메타우루스 전투를 벌이고 다시 한니발에게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4일이었다. 한니발은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동생 하스드루발이 그렇게 빨리 알프스를 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6]상자를 열어본 한니발은 경악했다. 이로써 로마 원정에 대한 그의 꿈은 산산히 부서졌다.[6]
조지 고든 바이런 경은 이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집필: 한니발을 속이고 하스드루발을 속인 필적할 데 없는 행군을 하여 군사 역사상 거의 견줄 데 없는 업적을 달성한 집정관 클라우디우스 네로. 한니발이 그의 귀환에 대한 첫 소식은 하스드루발의 머리가 그의 진영에 던져진 것을 보는 것이었다. 한니발은 이것을 보고 "로마가 이제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라고 한숨을 쉬며 외쳤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이 승리에 힘입어 그의 제국 동명이인이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오명이 다른 사람의 영광을 가렸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이름이 들리면 누가 집정관을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인간사는 그런 것이다.
메타우루스 전투의 중요성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 전투는 에드워드 셰퍼드 크리시의 ''세계를 바꾼 15번의 결정적 전투''(1851)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한니발을 이탈리아에 고립시킴으로써 로마의 대륙 지배를 향한 진출에서 카르타고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제거했기 때문이다. 폴 K. 데이비스는 이 전투의 중요성을 "카르타고의 패배로 한니발을 지원하려는 시도가 끝났고, 그의 이탈리아에서의 노력이 좌절되었으며, 로마는 스페인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6]
하스드루발의 장교 중 한 명인 하밀카르는 패배 후 치살피나 갈리아에 남아 4만 명의 연합 갈리아 군대를 조직하여 기원전 200년에 로마에 대항하여 플라켄티아를 약탈했으나, 크레모나 전투에서 로마에 의해 패배하고 죽임을 당했다. 한편, 살아남은 히스파니아 용병의 일부는 여정을 계속하여 결국 한니발에게 도달했다.[7]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카르타고 승리의 가능성은 사라졌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의 끝자락에 갇히게 되었다. 또한, 집정관 리비우스가 담당하던 전선에서 일어난 전투였기 때문에, 집정관 네로에게 개선식 거행은 허락되지 않았다.[6]
4. 3. 역사적 의의와 한국에 주는 교훈
메타우루스 전투는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승리함으로써 한니발의 이탈리아 원정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고, 로마는 이후 스페인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6]바이런은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한니발을 속이고 하스드루발을 격파한 메타우루스 전투의 업적이 군사 역사상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니발이 하스드루발의 잘린 머리를 보고 "로마가 이제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라고 탄식했다고 기록했다.
메타우루스 전투는 칸나에 전투나 자마 전투와 같은 다른 유명한 전투들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로마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스드루발의 패배 이후, 그의 장교였던 하밀카르는 갈리아족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저항했으나 크레모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7]
5. 전투 이후
집정관 네로는 하스드루발의 시신에서 목을 잘라, 그 목을 담은 상자를 한니발의 진영으로 던지게 했다. 상자를 열어본 한니발은 경악했으며, 이로써 로마 원정에 대한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6] 네로는 한니발 몰래 메타우루스 전투를 벌이고 14일 만에 돌아왔는데, 한니발은 동생 하스드루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6]
조지 고든 바이런 경은 이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집필: 한니발을 속이고 하스드루발을 속인 필적할 데 없는 행군을 하여 군사 역사상 거의 견줄 데 없는 업적을 달성한 집정관 클라우디우스 네로. 한니발이 그의 귀환에 대한 첫 소식은 하스드루발의 머리가 그의 진영에 던져진 것을 보는 것이었다. 한니발은 이것을 보고 "로마가 이제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라고 한숨을 쉬며 외쳤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이 승리에 힘입어 그의 제국 동명이인이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오명이 다른 사람의 영광을 가렸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이름이 들리면 누가 집정관을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인간사는 그런 것이다.
역사가들은 메타우루스 전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에드워드 셰퍼드 크리시는 저서 ''세계를 바꾼 15번의 결정적 전투''(1851)에서 이 전투를 포함시켰는데, 한니발을 이탈리아에 고립시킴으로써 로마가 카르타고의 위협을 제거하고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폴 K. 데이비스는 "카르타고의 패배로 한니발을 지원하려는 시도가 끝났고, 그의 이탈리아에서의 노력이 좌절되었으며, 로마는 스페인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6]
하스드루발의 장교 하밀카르는 패배 후에도 치살피나 갈리아에 남아 4만 명의 갈리아 연합군을 조직, 기원전 200년에 로마에 대항하여 플라켄티아를 약탈했으나, 크레모나 전투에서 로마군에 패배하고 죽었다. 한편, 살아남은 히스파니아 용병 일부는 계속 이동하여 결국 한니발에게 도달했다.[7]
5. 1. 한니발의 고립과 카르타고의 몰락
네로는 하스드루발의 시체를 찾아 그의 목을 잘랐다. 그러고는 그의 목을 가지고 데려온 병사를 모두 이끌고 다시 한니발과 대치하고 있는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네로가 한니발 몰래 빠져나가서 메타우루스 전투를 벌이고 다시 한니발에게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4일이라고 한다. 한니발은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동생 하스드루발이 그렇게 빨리 알프스를 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6]네로는 하스드루발의 목을 담은 상자를 한니발의 진영으로 던지게 했다. 상자를 열어본 한니발은 경악했다. 이로써 로마 원정에 대한 그의 꿈은 산산히 부서진 것이다.[6]
조지 고든 바이런 경은 이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집필: 한니발을 속이고 하스드루발을 속인 필적할 데 없는 행군을 하여 군사 역사상 거의 견줄 데 없는 업적을 달성한 집정관 클라우디우스 네로. 한니발이 그의 귀환에 대한 첫 소식은 하스드루발의 머리가 그의 진영에 던져진 것을 보는 것이었다. 한니발은 이것을 보고 "로마가 이제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라고 한숨을 쉬며 외쳤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이 승리에 힘입어 그의 제국 동명이인이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오명이 다른 사람의 영광을 가렸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이름이 들리면 누가 집정관을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인간사는 그런 것이다.
메타우루스 전투의 중요성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 전투는 에드워드 셰퍼드 크리시의 ''세계를 바꾼 15번의 결정적 전투''(1851)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한니발을 이탈리아에 고립시킴으로써 로마의 대륙 지배를 향한 진출에서 카르타고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제거했기 때문이다. 폴 K. 데이비스는 이 전투의 중요성을 "카르타고의 패배로 한니발을 지원하려는 시도가 끝났고, 그의 이탈리아에서의 노력이 좌절되었으며, 로마는 스페인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6]
하스드루발의 장교 중 한 명인 하밀카르는 패배 후 치살피나 갈리아에 남아 4만 명의 연합 갈리아 군대를 조직하여 기원전 200년에 로마에 대항하여 플라켄티아를 약탈했으나, 크레모나 전투에서 로마에 의해 패배하고 죽임을 당했다. 한편, 살아남은 히스파니아 용병의 일부는 여정을 계속하여 결국 한니발에게 도달했다.[7]
하스드루발의 머리는 박제되어 한니발의 진영에 던져졌다. 이때까지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이탈리아 도착과 죽음을 몰랐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카르타고 승리의 가능성은 사라졌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의 끝자락에 갇히게 되었다. 또한, 집정관 리비우스가 담당하던 전선에서 일어난 전투였기 때문에, 집정관 네로에게 개선식 거행은 허락되지 않았다.
5. 2. 로마의 패권 확립과 지중해 세계 재편
네로는 하스드루발의 시체를 찾아 그의 목을 잘랐다. 그러고는 부하들을 이끌고 한니발과 대치하고 있는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네로가 한니발 몰래 빠져나가 메타우루스 전투를 벌이고 다시 한니발에게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4일이었다. 한니발은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동생 하스드루발이 그렇게 빨리 알프스를 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6]네로는 하스드루발의 목을 담은 상자를 한니발의 진영으로 던지게 했다. 상자를 열어본 한니발은 경악했다. 이로써 로마 원정에 대한 그의 꿈은 산산히 부서졌다.[6]
조지 고든 바이런 경은 이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6]
메타우루스 전투는 에드워드 셰퍼드 크리시의 ''세계를 바꾼 15번의 결정적 전투''(1851)에 포함될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로 한니발은 이탈리아에 고립되었고, 로마는 카르타고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며 대륙 지배로 나아갈 수 있었다. 폴 K. 데이비스는 "카르타고의 패배로 한니발을 지원하려는 시도가 끝났고, 그의 이탈리아에서의 노력이 좌절되었으며, 로마는 스페인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6] 칸나에 전투에서의 한니발의 대승이나 자마 전투에서의 최종 패배와 같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다른 전투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마르쿠스 리비우스의 승리는 로마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6]
하스드루발의 장교 중 한 명인 하밀카르는 패배 후 치살피나 갈리아에 남아 4만 명의 연합 갈리아 군대를 조직하여 기원전 200년에 로마에 대항하여 플라켄티아를 약탈했으나, 크레모나 전투에서 로마군에 패배하고 죽임을 당했다. 한편, 살아남은 히스파니아 용병의 일부는 여정을 계속하여 결국 한니발에게 도달했다.[7]
하스드루발의 머리는 박제되어 한니발의 진영에 던져졌다. 이때까지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이탈리아 도착과 죽음을 몰랐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카르타고의 승리 가능성은 사라졌고, 한니발은 이탈리아반도의 끝자락에 갇히게 되었다. 집정관 리비우스가 담당하던 전선에서 일어난 전투였기 때문에, 집정관 네로에게 개선식 거행은 허락되지 않았다.[6]
참조
[1]
서적
La battaglia del Metauro. Testi, tesi, ipotesi
Minardi Editore
1994
[2]
웹사이트
The Hannibalic War, 52
https://www.livius.o[...]
[3]
웹사이트
27.49
http://etext.lib.vir[...]
[4]
서적
Hannibal
Beck
1998
[5]
논문
Magister Elpehantorum: A Reappraisal of Hannibal's Use of Elephants
[6]
서적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The World’s Major Battles and How They Shape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7]
서적
History of Rome
[8]
웹사이트
T. E. Lawrence Studies
https://web.archive.[...]
2011-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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